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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2014)

영화 MOVIE

by USG_사이클론 2020. 11. 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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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

 

Whiplash

매 맞아 빚어낸 긴장과 전율의 리듬은 노력인가 깊은 흉터인가

★★★★☆

 

 예술에 대한 신념은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가볍게 하려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진지한 것을 넘어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기도 한다. 여기서 엄격하다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깝다. 가볍다는 것도 기본적인 지식 없이 대충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실력을 요구하되 즐기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냐의 문제는 상관없다고 본다. 그저 각자의 스타일이 다른 것이니까.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가르침의 방향. 무엇이든 노력해서 결과물이 나온다고 하지만 실상은 억지로 쥐어 짜내는 일이 은근 많다. 실수를 하고 따라오기 벅차게 보이는 상황에서 더욱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방식. 이게 과연 정당한 걸까. 단순한 질책 정도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한 사람의 정신을 마구 짓밟는 수준의 인격 모독까지 나오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음악영화라고 하지만 듣기에 따라 불편하고 리듬이 빨라질수록 긴장이 더욱 커지는 것이 묘하게 인상적이다. 연주하는 사람의 심리가 리듬에 묻어나오는 느낌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어디선가 연주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음악도 즐겁게 들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런 것처럼 영화 속 인물이 처한 상황이 그대로 음악으로 표출되는 듯하다. 이게 연주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저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 음악영화이면서도 결국에는 스릴러영화가 되고 만다.

 작중에는 두 명의 미친놈이 존재한다. 한 명은 최고가 되기 위해 미쳐가는 학생. 다른 한 명은 최고가 아니면 인간 취급하지 않는 미친 교수. 서로 다른 예술 지향점의 충돌하며 오기와 오기의 싸움으로 그려지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같겠지만 내가 볼 때는 전혀 아니다. 분명 음악적인 전율과 놀라움은 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이 존재하느냐면 그렇지 않게 보인다. 겉으로는 완벽하고 멋질지 몰라도 예술가 스스로의 내면을 끊임없이 갉아먹어 생명을 단축시키는 악마의 예술이라는 생각이다. 노력의 완성이 아닌 사람을 갈아서 뽑아내는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좋다, 나쁘다의 문제를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은 탓에 의견이 갈릴만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저 내 의견은 나쁘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의 기분 나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플레처 같은 학원 선생이 공부 못한다고 수시로 때린 기억이다. 얼마나 플레처와 똑같았냐면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것부터 의자를 집어던지는 것까지 전부 빼닮았다. 작중에서 앤드류가 망가져가는 모습과 엇비슷하지만 완전 똑같지는 않다. 앤드류 보다는 작중에서 언급되는 플레처의 옛 제자처럼 되기 직전이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학교 시험을 잘보고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 무엇을 하는 것조차 의미 없을 정도로 정신이 죽는 걸 경험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이 상처는 여전하다. 무엇을 하든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을까봐 매사가 불안하다. 어딘지 모르게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심하게 긴장된다.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아 아무 것도 진전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채로 죽어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거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괴팍한 스승을 넘어선 제자의 노력으로 포장되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그저 가해자 미화일 뿐이다. 사람이 망가져 가는 걸 생각하지 않고 노력이니 근성이니 하는 건 정말 생각 없이 하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명연주 역시 악마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사로잡혀 버린 천재의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괴팍한 스승을 뛰어 넘겠다면 그 괴팍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성공하면 그만이다. 당신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 이걸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앤드류는 플레처를 만족시켜버림으로서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됐다. 자유로운 비행이 아닌 새장에 만족하고 적응해버린 것이다.

 좋은 결과만 나오면 과정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을 사람이라 보지 않고 건전지 갈아 끼우듯이 최대한 뽑아 먹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니까. 뒤숭숭한 과정으로 나온 걸과를 노력이라는 건 기만이다. 개인 혹은 여러 사람의 상처가 새겨진 깊은 흉터의 증거다. 아픔과 고통, 비명을 승화시켜 뽑아낸 걸작이다. 한 번에 극한으로 몰아붙이면 예상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나올지 몰라도, 그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활약할 수 있을 인재나 천재의 앞날이 끊겨 버릴 수 있다. 화려한 피날레가 아닌 너무 일찍 연주되는 장송곡이다. 얼마나 큰 손실이고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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