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크림슨 피크(2015)

영화 MOVIE

by USG_사이클론 2020. 5. 22. 20:59

본문

크림슨 피크

 

Crimson Peak

과거의 망령이 만들어내는 잔혹한 로맨스

★★★★☆

 

 오래된 것은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거쳐 가고, 그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의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소중한 비밀 같은 거면 모를까, 오래된 비밀이라고 하면 대부분 추악한 과거나 진실인 경우가 많다. 고상한 것들은 놔두고, 지저분한 들켜서 안 될 것들은 과거에 묻어버리고. 이런 식으로 하면 영원한 고귀함과 깨끗한 이미지만 남는 줄 알겠지만 크나큰 착각이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이 흐르면 풍화되고 녹이 슬며 본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거기서 확실히 결정이 난다. 예스러운 고귀함이냐, 아니면 과거에 사로잡혀 썩어가는 추악함이냐.

 고풍스러운 과거 미국의 예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잔잔히 진행되는 스토리다 보니 그냥 공포영화 보는 느낌으로 보면 굉장히 지루할만하다. 이게 그냥 공포장르가 아닌 고딕장르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렇다. 고딕하면 그냥 오래된 건물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딕은 공간적 배경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빛이 있어도 밝아 보이지 않는 음울한 분위기. 오래되다 못해 무너져 가는 폐허와 귀족적 화려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주는 부조화. 로맨스의 경우는 초기 고딕에서 자주 나타나던 스타일인데, 이 영화는 초기 스타일과 현재 스타일을 모두 넣은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보니 단순한 호러물이라 생각하고 봤다가는 전혀 무섭지 않을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고딕 장르가 메인이 되다보니 여러 고딕 소설의 느낌이 많이 들어 있어 보였다.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느껴진 건 이렇다. 어셔 가의 몰락(에드거 앨런 포), 샤이닝(스티븐 킹), 벽 속의 쥐(러브크래프트), 힐 하우스의 유령(셜리 잭슨). 이 소설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작중 분위기나 스토리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감독의 취향이 취향이다 보니 온갖 고딕 스타일을 많이 참고한 것 같긴 하겠지만.

 주인공 이디스와 준남작 토마스 샤프는 어떻게 보면 둘 다 이방인이다. 이디스는 고풍스러운 주변 환경을 다소 멀리하는 이방인. 토마스 샤프는 미국 땅의 유럽인이라는 이방인.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더 정확히는 현재에서 자유로운 이방인과 과거에 고립된 이방인이다. 이 둘이 함께 도착하는 저택 크림슨 피크 역시 변방에 위치한 곳.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과 외관 모습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인상은 이렇다. 과거가 고여 있는 곳. 현재에서 점점 침식되어 사라져 가는 과거의 형상. 웅장하면서도 뭔가 질척질척하게 들러붙는 기분은 단순히 외적인 이미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여담으로 영화 속의 메인 배경이 되는 샤프 준남작의 저택은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 치고는 굉장히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고딕의 모든 것을 농축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라 촬영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철거했다는 소식에 너무나 안타까웠다.

 저택에서 등장하는 유령은 외형만 놓고 보면 기괴함 그 자체이지만 흔히 아는 공포영화 속 모습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다른 공포영화와 비교하면 전혀 무섭지 않다. 이것은 고딕 장르에서 나오는 유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의 유령을 쉽게 설명하지면 셰익스피어의 햄릿 초반에 성벽 감시 초소에서 등장하는 유령 같은 경우라고 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겉으로는 두렵게 생겼지만 주연 인물에게 여러 암시를 주는 존재. 짧게 등장하고 굵은 영향을 남기는 장치. 고전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클리셰라 할 수 있다. 클리셰라 하면 진부한 것이라는 인상이 먼저지만 이런 예스러운 스타일에서는 그 시절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봐도 나쁘지 않다.

 로맨스 요소에 대해서는 암울하고 비극적인 고딕 스타일의 정석이다. 다소 충격적인 비밀만 빼면 약간 뻔한 고전 로맨스 극이긴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이디스가 느끼는 위화감은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상 저택에 도착한 시점부터 이디스와 함께 오래되고 웅장한 배경 속으로 빨려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갈수록 뭐가 더 나올지, 이 샤프 가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안에는 이디스와 토마스 샤프 간의 로맨스도 엮여 있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실 된 사랑인가. 토마스 샤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심연의 끝에는 언제나 충격적인 진실이 숨어 있는 법이다. 절대 들어나서는 안 되는 사실은 대개 이런 곳에 숨기니까. 하지만 언제나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어두운 곳에 숨겨야 하는 소중한 것이 있을 때도 있다.

 중후반부 들어서는 약간 고전 탐정소설에 대한 오마주 같은 스타일로 보이기도 했다. 조연 중에 탐정(소설에 나오는 홈즈 같은 것이 아닌 현실적인 탐정에 가깝다.)에 해당되는 인물이 있고 간간히 추리소설이 비춰지는 탓에 더 그렇게 보였다. 사실 추리적으로 갈 수도 있는 게 고딕 장르 특성상 오래된 대저택의 비밀을 파해 치는 구도가 많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라는 것이 무조건 살인사건을 다루는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인 사건 외에도 기이한 사건, 때로는 어두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일 같은 것도 포함되는 포괄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통적인 고딕에 다소 후기 스타일에 가까운 고딕 미스터리까지 더해져 모든 고딕 스타일의 총집합이나 마찬가지다.

 화려한 고딕 스타일만 빼면 좀 전형적인 영화라 할 수도 있지만, 그 전형적인 구성 덕에 이 영화가 더 돋보인다고 본다. 그냥 뻔한 것밖에 안 떠올라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애정을 담아 고전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장인의 노력이다. 뻔한 거라도 잘 만들면 멋지게 보일 수 있다는 예시라 해도 좋을 듯하다. , 이런 미적인 부분에 전혀 관심 없다면 그냥 지루하기만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영화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있다(2020)  (0) 2020.06.25
언더워터(2020)  (0) 2020.06.02
온다(2018)  (0) 2020.05.15
스케어리 스토리: 어둠의 속삭임(2019)  (0) 2020.03.28
셀(2016)  (0) 2020.03.22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