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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9)

영화 MOVIE

by USG_사이클론 2020. 3. 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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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돋보이는 촬영기법으로 담은 기약 없는 시간 싸움

★★★★★

 

 사람을 가장 피 말려 죽이는 것이 시간이다. 그것도 기약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버티는 것.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채로 흘러가는 몇 날 며칠. 그저 버틴다고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편히 있지 못하는 극한의 환경까지 더해지면 흐릿해질 신경도 곤두설 수밖에 없다. 날카로워진 신경은 한 번 갈피를 잡지 못하면 산채로 죽은듯한 방황에 빠지고 만다. 오래 버티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기. 시간 속을 떠내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이런 걸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목격자들이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거대한 전쟁에 참전한 이들 말이다.

 그 동안 거대한 전쟁하면 자주 봤던 것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이다. 아무래도 국내 역사와 많이 연관되어 있다 보니 자주 접하고, 매체에서 다루는 세계대전하면 거의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비중이 많다보니 그렇게 보인다. 그에 비하면 1차 세계개전을 다루는 내용은 생각보다 접한 적이 없다. 그나마 본 거라고는 다큐멘터리 정도? 사실상 유럽 내에서만 벌어졌다는 인상이라 관심도가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교과서에서는 형식적으로만 배우다보니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에 비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나타난 분위기를 보며 얼마나 고통의 연속이었고 심각한 일이었는지 다시 알게 됐다.

 대부분 인물이 지나면서 주변의 모습을 한꺼번에 담아내는 촬영기법이라 정말 인상적이다. 넓게 펼쳐진 구도 안에서 온갖 자잘한 요소를 모두 담아 하나의 거대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형식이라 그렇다. 그저 주연인물이 지나가는 것뿐인데도 곳곳에서 전쟁의 참상이 들어난다. 복잡한 참호 안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지쳐 있는 병사. 들것에 실려 가는 부상병. 수습이 여의치 않아 곳곳에 널려있는 전사자들과 유품들.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커다란 쥐 때와 까마귀 무리. 전쟁의 여파가 확연히 보이는 도심의 폐허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 그리고 아무런 배경음이 없어서 느껴지는 적막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 받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간 싸움이라는 키워드는 배경 요소뿐만 아니라 스토리 전개와 연출에서도 녹아들어 있다. 뭔가 뻔해 보이던 스토리 전개가 갑작스럽게 틀어져 버리는 변수. 발로 뛰어서 아군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했던 연락병의 고난. 아무런 교전 없는 잔잔한 순간임에도 느껴지는 긴장감. 느닷없이 발생한 교전에서 느껴지는 긴장도 잠시, 그것마저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생기는 조바심. 별다른 진전 없이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허탈함. 각종 무기와 병기가 부각되고 전투 하나하나에서 비장함이 살아 있는 2차 세계대전과 비교해 보면 느낌이 다르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끝내야 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잔인한 굴레. 이 모순의 연속인 문장이 실제 있었던 역사라고 하니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겨운 상황이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결말로 다가가면서 점점 지쳐가는 주연 인물의 모습은 그가 겪어온 여정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냥 지쳐 보이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이 파김치를 넘어 혼이 나갈 정도로 무너진 모습이라 인상적이다.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어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여긴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이 상황은 언제 끝나는가. 문득 아른거리는 내가 진짜 살아있는 것이 맞긴 한 건가 싶은 의심. 개인적으로 느낀 분위기는 이렇고 정확히 묘사하자면 이렇다고 보면 된다. 몸은 간신히 살아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거의 죽어간다. 그럼에도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 발걸음에서 여러 의미가 있어 보였다. 상황이 더 악화 되지 않기 위한 임무 완수. 방금 전까지 넋이 나가있던 사람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 시간이라는 멈출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어떻게든 이겨보겠다는 절박함. 아주 잠깐의 1, 1초로 모든 것이 결정나버린다는 것이 이렇게 실감나고 두렵게 다가온다.

 집에 가고 싶다. 길고 길게 이어지는 전쟁터에서 한 번 쯤은 들을 말이다. 보통은 전장을 앞에 두고 생긴 두려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죽음의 공포에서 비롯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전이 지속되면서 더욱 직접적인 의미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진짜 집에 가고 싶다. 살아남아서 가족들을 보고 싶다. 그러니까 제발 좀 끝났으면 좋겠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렇게 묻다 보면 애초에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떻게 시작됐든 간에 끝에 가서는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남는 건 상처뿐. 승리나 업적마저 자질구레한 것이 되고 만다. 반전(反戰) 메시지는 거기서 거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처음이다. 이게 바로 1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이자 비극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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