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준지/시공사
일본 만화
★★★★☆
뒷골목
하숙집 옆에서 밤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는 곳은 높은 담으로 막혀 있는 뒷골목인데...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스토리라 공포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든다. 일방적으로 습격하는 공포가 아닌 미지의 공포를 탐색하는 구성이라 마치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현실적인 공포인데다 기괴한 묘사도 겉핥기식이라 살짝 김이 빠질 수도 있다.
패션모델
대학 영화 동아리에서 다음 작품을 위해 여배우를 모집한다. 그런데 프로 모델이라고 하는 어느 기괴한 여자가 신청을 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섬뜩한 비주얼 하나만으로 승부 보는 내용이다. 뻔히 눈앞에 다 보이는 공포인데 무섭기나 하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비주얼도 한 순간에 나타나는 임펙트가 중요하지, 계속 보다보면 익숙해지지 않겠냐고. 하지만 괜히 비주얼로 승부 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공포를 더 원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무서운 존재가 눈앞에 떡하니 있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온갖 상상을 하고도 남는다. 흔한 배드 엔딩부터 예상 못할 충격적인 것까지. 무엇이 나오든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불길함이 명확한 이미지로 나타나는 과정이야 말로 섬뜩한 비주얼보다 더 큰 고통을 선사하는 공포라는 걸.
낙하
갑작스럽게 자살시도를 한 아내.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데다 유서에는 어떤 이변이 생길 거라는 말 밖에 적혀있지 않다. 이런 와중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전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사건만 주구장창 일어나기 때문에 이게 뭔가 싶을 것이다.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코스믹 호러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상황이나 존재가 나타나는 경우라고 알면 된다. 이런 형태의 공포는 마지막에 가서 실체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끝까지 맥거핀으로 남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무책임한 결말이라기보다는 도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하는 공포의 여운을 남기는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봐야겠다.
다인실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된 하시모토. 문제는 가해자와 함께 다인실을 쓰게 돼서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병실을 쓰는 또 다른 4명의 여인 역시 뭔가 수상하게 보인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무엇을 하든 4명 모두 같이 행동하는데...
어딘가 살짝 <인베이전>이나 <보디 에일리언>이 연상되는 내용이다. 괴생명체가 일상 속에 녹아들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덮쳐오는 구성을 가진 종류의 장르를 접해본 적이 있다면 상당히 익숙할 것이다. 괴생명체의 독창성이나 디자인 면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이토 준지 만화의 대부분이 그렇듯 열린 결말이라 상당히 김빠진다. 특히 이 단편의 경우는 기승전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에서 결말을 내버렸기 때문에 더욱 큰 아쉬움이 느껴진다.
여관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광기에 휩싸여 집 안에서 온천을 파며 시작하게 된 여관. 가족 모두가 떠나고 아버지 혼자 운영하고 있다는 말에 궁금한 나머지 직접 방문하게 되는데...
다소 뜬금없이 시작해서 뜬금없이 끝나는 게 이토 준지 만화의 전형적인 패턴이지만, 이건 조금 심심한 인상이다. 기괴한 걸 보여주러 가는 과정이 전부라는 점부터 스토리가 단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다른 단편에서도 흔하게 보였던 부분이다. 진짜 문제라면 작중 최대 떡밥인 온천을 다루는 분량이다. 묘사 면에서는 기괴한 분위기는 확실하지만 후반부에서 잠깐만 보여주고 끝나다보니 거의 맥거핀이나 다름없다. 어느 정도의 해석을 남겨두긴 했지만 확 빨려들게 만드는 몰입감이 다소 적다보니 밋밋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확실한 무언가를 안 보여주고 중간에 끊어서 끝내 버리는 도시전설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승낙
여자 친구 미스즈네 가족의 극렬한 반대로 결혼 승낙을 받지 못한 쿄스케는 참다못해 결국 헤어지는 길을 선택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똑같이 반대하는 입장이던 미스즈의 오빠가 갑자기 찾아와 사실은 결혼에 찬성한다면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는데...
전반적으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틱한 내용이라 갑자기 장르가 달라졌다는 생각에 당황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요소가 나올지 긴장하려해도 그 어떤 비현실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 한결 같은 사랑 이야기 그 자체다. 하지만 이런 호러 색체가 전혀 없어 보이는 스토리인 경우, 마지막 결말 부분에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스토리 어딘가에서 숨겨진 진실이 있다 던지 하면서. 그럼에도 이 단편은 100% 호러라 하기는 애매하다. 약간 섬뜩하고 슬픈 호러로맨스?
흡연모임
어느 학교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흡연모임. 그 모임의 주동자인 나카야는 직접 만든 담배를 나눠주며 특별한 재료로 만든 거라 하는데...
특이한 소재거리가 나옴에도 딱히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기이한 담배 묘사만 보는 게 전부라 할 수 있다. 앞서 나온 여관은 그나마 하나의 스토리라 봐도 될 구조지만 흡연모임은 시놉시스만을 가지고 만화를 그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스토리만 놓고 보면 가장 알맹이 없는 단편에 해당된다. 한편으로는 담배의 해로움을 이토 준지 나름의 방식으로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금연 캠페인 만화일지도...
곰팡이
해외에 나갔다가 1년 만에 귀국한 나. 그 동안 집에 세를 들어 놨고 하필이면 악연이나 다름없던 중학교 시절 과학 선생님이 지내게 됐다는 점이 굉장히 꺼림 직하면서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집 안에 들어서니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집 안은 난장판에 곳곳이 곰팡이 투성이였는데...
별거 아닌 걸 과장시켜 표현해서 만드는 것만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호러연출은 없다. 특히 원래부터 혐오스러운데 그걸 더욱 과장시킨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만화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책 페이지를 만지는 것조차 꺼림직 할 정도로 곰팡이 묘사가 소름끼치고 점점 역겹게 발전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혐오 그 자체다. 스토리도 어떻게 보면 곰팡이와의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단순히 곰팡이가 나오는 정도가 아닌 인간관계로서의 곰팡이 같은, 혐오스러운 존재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 주변을 더럽히는 악연. 게다가 한 번 생기면 빠르게 번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끔찍해진다. 자신 역시 그 더러운 악연에 동화 돼버린다는 것이니까.
길 없는 거리
가족들의 알 수 없는 엿보기에 질린 나머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모 집으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이모가 사는 동네가 이상하게 변해 있었는데...
개인 프라이버시를 소재로 기괴한 공간과 스릴러 스토리를 만들어내서 5권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단순히 누군가가 엿보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적인 공간이 아예 사라진 세계. 내 집이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 되어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곳. 현실적인 문제와 기괴한 설정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세계 그 자체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나 다소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도 아쉬운 점이 없다. 그나마 아쉬운 게 있다면 짧은 단편으로 끝났다는 정도?
기억
어린 시절 특정 나이대의 기억이 없는 리에. 그 때문인지 자신의 외모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불안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승낙>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내용인데 초자연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심리 스릴러에 해당된다. 그냥 단순히 외모와 관련된 반전이 있는 평범한 내용에 몇몇 묘사만 빼면 무섭게 보이는 부분이 아예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세 번 반복해서 보다보면 이 만화가 왜 섬뜩하게 보이는지 어느 정도 감이 온다. 보통 반전 요소로 나타난 진실을 통해 사건의 당사자가 회개하는 전개가 흔하지만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데 진실을 알고도 그 관점을 다르게 두고 이해해버리는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가령,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자각을 했지만 반성이 아닌 안심을 해버리는 경우. 그러니까 잘못을 했긴 했지만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증 받았다는 만족감에 심취한 모습을 말이다. 기괴한 요소 없이 현실 그 자체라 금방 눈에 안 들어오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무섭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더더욱.
아이스크림 버스
어느 추운 겨울, 아파트 단지에 찾아오는 아이스크림 버스. 그냥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서비스로 아이들을 태워 동네 한 바퀴를 돌아준다고 한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 단 둘이 살던 소노하라는 날씨가 추운 탓에 아이스크림을 사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들과 다투게 되고 결국 소노하라는 하는 수 없이 아이스크림을 사주게 되는데...
흔한 일상에 기괴한 것이 자연스레 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봤던 것과 또 다른 기괴함을 느낄 수 있다. 처음부터 기괴한 무언가를 점점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최대한 극대화 시켜서 보여주던 것과 달리, 이 만화는 거의 결말에 가서야 한꺼번에 터지기 때문에 그 충격이 배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찬찬히 보면 생각보다 단순한 소재와 스토리임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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