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준지/시공사
일본 만화
★★★★☆
바이오 하우스
악식을 즐기는 사장의 별장에 초대받은 비서. 상상 이상의 징그러운 음식을 대접받던 중,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걸 목격하고 마는데...
간혹 인터넷에서 봤을 법한 징그러운 재료로 만든 음식이나 벌레를 살아있는 채로 먹는 생식이 소재라 보면 되겠다. 비주얼 적으로 징그러운 요소가 상당하고, 특히나 엄청난 벌레 파티가 묘사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살짝 뱀파이어물이 섞여 있다는 느낌도 있다. 생식과 악식의 개념을 생각하면 딱히 부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지는 않지만.
얼굴도둑
전학 온 학교에서 만난 여학생 카메이. 그녀는 미인들에게 들러붙어 얼굴을 똑같이 베끼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단순하면서도 기묘한 설정으로 시작해 충격적이고 기괴한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이 꽤 인상적이다. 카메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살짝 토미에의 열화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증식하면서 늘어나며 자만으로 가득한 토미에와 비교하면, 카메이의 경우는 얼굴을 복사해서 상대의 자리를 뺏는 형식이다. 똑같이 외모를 주제로 만든 캐릭터지만 카메이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모방을 통해서 생긴 자신감도 역시 모방의 산물일 뿐. 자기 자신만의 이미지가 없다면 나 자신의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무언가를 따라할 줄 밖에 모르는 괴물이 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겁 없이 밑장 빼기를 상습적으로 하다가는 언젠가 크게 당하게 된다는 걸.
수마의 방
소설가 지망생 남자친구가 며칠 째 잠을 못자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잠이 들면 꿈속의 자신이 현실로 나오려고 한다는데...
징그러움과 감동이 공존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현실세계와 다른 세계의 경계점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는 점은 나름 기발하게 볼 부분이다. 대체로 이토 준지의 만화가 비극적이나 참극, 아니면 유혈사태가 없더라도 그다지 희망적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끝나는 편이다. 그런데 이 단편의 경우는 과연 비극적이라고 봐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기괴한 세계가 일상을 집어삼켰을 뿐, 결과적으로만 보면 손해를 본 이는 없기 때문이다.
악마의 이론
어느 여학생이 자살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행복해 보였는데. 장난으로 그녀의 가방에 카세트 녹음기를 넣었던 나는 녹음된 내용을 듣고 전말을 알게 되는데...
기괴한 묘사 없이 오직 스토리로만 이해해야 되기 때문에 한 번 보고는 살짝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작중 사건의 발단이 되는 <무엇>에 해당되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 포인트인데, 이걸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고도 남는다. 미지의 공포이면서 예상보다 쉽게 접근이 가능한 금단의 경계점이 만드는 기묘함, 예상치 못한 나름의 반전이 나쁘지는 않지만 살짝 심심하다는 인상도 적지 않다.
지붕 밑의 머리카락
남자친구의 취향에 맞춰 긴 머리를 기르던 여자가 이별을 통보 받는다. 슬픔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머리카락에 쥐가 감겨 죽어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머리카락은 나름의 역사를 가진 호러 소재다. 이미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만화가 2개(토미에 단편, 소용돌이 에피소드)나 있는데도 전부 다 다른 느낌인 걸 보면, 작가는 중복되는 소재라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그 공포의 이미지도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만화에서 묘사되는 머리카락은 이미 다른 곳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형태긴 하다. 이런 형태를 처음 봤다면 몰라도 머리카락을 이용한 호러하면 많이들 생각할 형태라 크게 신선한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역시나 비주얼 하나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충분하다.
시나리오대로의 사랑
극단에서 만나 사귀던 다카하시의 외도를 버티다 못해 결국 칼로 찌르고만 카오리. 상황을 수습하지 못해 당황하던 것도 잠시, 다카하시가 특별히 준비해 왔다는 걸 보게 되는데...
이 단편 역시 기괴한 묘사가 전혀 없는 내용이지만, 기묘한 분위기 하나는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생을 누구나 꿈꾸지만 현실은 언제나 엇나가기 마련이다. 믿음은 곧 배신으로 돌아오고 구차한 변명은 속을 더 긁어 놓는다. 결국 최악의 순간까지 몰린 그때 나타나는 완벽한 시나리오란.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 도피일까.
소생술사의 검
친구와 함께 오밤중에 도깨비불을 잡으러 나온 케이지. 곧 숲 속에서 엄청난 도깨비불 행렬을 발견하고 신사에 있던 누군가를 목격하게 되는데...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이 나오지만 이토 준지 만화인 만큼 절대 평범하지 않다. 부활의 묘사부터 기묘하고,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영생에 대한 욕망까지 나타나 있어 살짝 현실 비판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소생의 매개체가 검이라는 점, 그것도 어딘가 마야나 아스텍 문명에서 나올 법한 디자인으로 보인다는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스텍의 인신공양의 형태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한다. 아스텍에서는 영혼을 하늘에 바치는 형태겠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불러들이는 형태니.
아버지의 마음
츠카사는 친구 에이이치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동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에이이치의 집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에이이치의 동생인 미호가 가끔 식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초반 스토리만 보면 가족의 비밀을 둘러싼 기묘한 스릴러 분위기지만, 이걸 공포만화라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될 정도로 서글픈 주제를 다룬다.
엄격한 아버지가 있는 분이라면 꽉 막힌 이미지를 바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러했을까. 분명 아버지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저 노는 게 재미있고 하루하루가 즐겁던 시절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제대로 놀지 못하고 보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일만 하면서 어른이 된 아버지도 놀고 싶다, 어린애처럼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못해본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아니, 평생을 함께 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작중에 나타난 아버지의 서툰 표현이다. 어린 시절의 부족함을 채우는데 급급해 가족을 위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이게도 자신만을 위한 것만 생각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부족함이 연장선으로 이어져 만들어진 잘못된 집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견디기 힘든 미로
등산을 갔다가 산 속을 헤매던 중 어떤 사찰을 발견하게 된 여학생들. 해가 뜰 때까지 잠시 머물려 했지만, 곧 정신수양이라는 목적으로 며칠 더 머물게 되는데...
괴이한 종교시설에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도 공포지만, 결말로 갈수록 답답한 분위기를 조성해서 압박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답답함이란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 고구마 같은 전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숨조차 쉬기 힘든 환경 같은 걸 말한다. 가면 갈수록 작중 인물들은 좁은 곳으로 들어간다. 더 이상 배경으로 답답함을 주기 힘들기까지 가면 다른 요소까지 채워가며 제목 그대로 견디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어 정점까지 찍는 것이 이 만화의 핵심이라 보면 된다.
사이렌 마을
어머니의 엽서를 받고 고향을 방문하게 된 쿄이치. 도중에 아는 누나였던 쇼코를 만나 같이 마을에 도착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다...
깊고 진한 코스믹 호러의 진수를 보여준 내용이라 몇 번을 봐도 충격적인 느낌을 받는다. 비록 악마와 오컬트적인 요소를 다루는 편이지만,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말 그대로 인간을 압도하는 괴 생명체가 전부 쓸어버리는 파멸적인 전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만화와 유명 호러게임인 사이렌이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요 소재를 보면 차이점이 존재하고 스토리도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게임 사이렌이 이 만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인상을 주긴 한다.
괴롭히는 아이
쿠리코는 좋아하던 남자 아이 때문에 놀이터에 자주 오던 중, 나오야라는 아이를 맡아주게 된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점점 놀아주기 귀찮아진 쿠리코는 나오야를 심하게 괴롭히게 된다. 그 후 성인이 돼서 쿠리코와 나오야는 다시 만나게 되는데...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다루기 때문에 그 동안 본 괴기한 묘사의 호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진부한 교훈이나 사회 비판을 다루지 않고 호러라는 본질을 다루기 때문에 이보다 더 충격을 주는 건 없을 것이다.
탈주병이 있는 집
2차 세계대전 징집을 피해 친구 집에 숨어 있는 탈주병. 변변치 않은 살림에도 의리로 친구를 숨겨주는 그 집에는 엄청난 비밀이 있는데...
반전의 반전인 스토리가 특징이면서 전쟁의 망령이란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작중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모두 전쟁으로 인해 여러 가지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 정신적 피해, 그리고 감정적 피해까지. 작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인물들 간의 감정적 문제로 발생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전쟁이 있다. 아마도 간접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비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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