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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2019)

영화 MOVIE

by USG_사이클론 2019. 3. 3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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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


Us

나, 우리, 진짜, 가짜. 공존할 수 없는 잔혹한 연결고리

★★★★☆


 자신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는 때는 언제라고 봐야 할까. 일단 정체성에 대해 하나씩 짚어보자.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 나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가치나 의미. 나 자신의 본질. 하나 같이 어려운 말들이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뿌리나 기둥과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중심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곳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여기저기 망가진 곳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단순한 물체라면 산산조각 나서 파괴되면 끝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그것도 사람이라면 말이 다르다. 정신적 근간이 흔들리면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생각이 무너지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결국 행동으로 표출되고 만다.

 감독의 이전 작품인 겟 아웃에서 보여줬던 기묘하면서 심오한 공포 색체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일단 눈에 보이는 전작과의 차이점은 확장된 관점이다. 겟 아웃이 좁은 시선, 좁은 환경, 특정 대상을 다루었다면 어스는 넓은 시선, 넓은 환경, 다수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좀 더 큰 의미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연출 면에서는 꽤 유혈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이라 좀 잔인한 편이긴 하다. 다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19금까지는 아니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자신과 똑같은 쌍둥이로부터 생존하는 스릴러 느낌이다. 쌍둥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보여주는 불길한 이미지와 이질감에서 오는 공포도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갈수록 크게 부각되는 면이 없다보니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슬래셔 영화 스타일의 살인마로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크고 복합적인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볼 수 없다.

 쌍둥이의 존재 자체를 보면 정체성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구도다. 보통 생각하는 생물학적 쌍둥이가 서로 분리된 정체성을 가진 것과 다르게 정통성을 따진다는 느낌이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잔인한 관계 말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한 순간에 모든 걸 빼앗긴다는 점이 상당히 무섭게 다가온다. 내가 죽어도 똑같은 사람이 나를 대체 한다, 내가 만들어 놓은 업적과 지위 같은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긴다……. 기묘한 한편으로 굉장히 현실적인 공포나 다름없다.

 개그 코드를 양념으로 뿌리는 게 감독의 취향인지 이번에도 웃기는 장면 은근 나온다. 살짝 B급 스타일 느낌에 분량이 어느 정도 되는 편이다보니 진지한 분위기를 흐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분위기를 싫어한다면 싫어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블랙 코미디(의미가 좀 다를 수도 있지만...)처럼 보여서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뜬금없고 스토리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니까.

 상징성면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나중에 따지고 보면 설정과 현실성 사이의 절충이 좀 부족한 편이긴 하다. <겟 아웃> 역시 현실적으로 따지고 들면 오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고 넘길만하다. 반면 이 영화 속 쌍둥이 설정은 생각해 볼수록 경우의 수가 꽤 나온다. 경우의 수가 많다는 것은 영화에 나온 장면에 금방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고 개연성 문제를 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넓은 시점을 다룬 탓인지 주제를 파악하기에 난해한 감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에 알아볼 만한 상징이 딱히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하게 무엇이다, 라는 의미가 와 닫지 않다 보니 더 그럴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해석(스포 주의, 정설이 아닌 개인적 추측이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미국의 극단주의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초반의 80년대 배경에서 텔레비전 광고로 나오는 인간 띠 만들기는 화합을 상징한다. 반면 현재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쌍둥이들의 인간 띠는 집단적 존재감과 동시에 공포와 위압감을 조성한다는 느낌이다. 검은 토끼가 흰 토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장면도 백인우월주의를 나타냈다고 본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인간 띠라는 부분에서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멕시코 국경장벽이 연상되기도 한다. 주인공과 마주한 쌍둥이가 너와 똑같은 사람이라 주장해도 될 법한 말을 굳이 우리는 미국인이라고 강조한 부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흉기로 사용하는 가위는 역사적으로 단절을 상징한다. 진짜와 쌍둥이의 관계를 이성과 비이성으로 본다면 가위로 죽이는 행위는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배척한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타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는 점은 보통 사람이 극단주의에 빠지는 과정으로 보이고. 위에서 언급한 정통성을 따진다는 부분도 순혈주의로 보인다는 느낌이고. 가위의 색깔인 금색은 아름다음과 속물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어 극단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일만 하다. 공통적으로 입고 있는 붉은색 작업복은 간단하게 위협적인 이미지와 집단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한 쪽 손에만 끼고 있는 가죽 장갑에 대한 부분은 정확한 명칭이 뭔지 몰라서 알아낼 수가 없었다. 좀 아쉬운 부분이다.

 주인공 가족의 경우는 내면의 극단주의를 이겨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 같은 외부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흑인이라는 점 때문인지 쌍둥이의 공격에 대비를 잘한다. 반면 백인들의 경우는 아무런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걸 반영한 것처럼 쌍둥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친한 옆집 사람들이 전부 살해당하고 쌍둥이들로 대체된 모습은 흡사 가까운 이웃이라도 극단주의에 물들면 위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이 부분은 생각해 둬야 한다. 감독은 <겟 아웃>에서도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인종차별을 말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인종차별 같은 고정관념을 조명하고, 한쪽을 절대적인 악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등. 단정적인 결론을 배척하고 예외는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나타난 극단주의 역시 간단하게 나타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이 느껴진 것이 바로 주인공의 정체에 대한 반전에서였다. 주인공은 사실 진짜가 아니고 가짜, 즉 쌍둥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의 자리를 뺏은 가짜다. 작중의 쌍둥이들 중에서 처음으로 탈출한 최초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좀 더 고찰해 볼 점이 나온다고 본다.

 현재에 일어난 쌍둥이들의 난입만 보면 일방적인 공격으로 보이지만, 과거 시점을 보면 이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알 수 있다. 대중을 통제할 목적으로 쌍둥이들이 만들어졌다는 점만 봐도 전체주의가 밑바탕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실패했다는 부분에서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그 이후로 버려진 쌍둥이들은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진짜들의 움직임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정도다보니 보다 못한 것들로 어설프게 재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로 보자면 보통 사람들보다 못사는 하층민 계층으로 볼 수도 있다. 쌍둥이라는 점은 이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이런 곳에 자신들의 실상을 알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힘들게 사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생각하지 않고 무시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면 없애버려야겠다.

 이게 바로 극단주의의 시작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성과 비이성의 문제도 편견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게 된다. , 쌍둥이들이 가위로 죽이는 행위는 자신들이 단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진행형인 단절에 대한 반격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체성의 본질을 잃은 이들이 어떻게든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내려다 보니 우월주의, 순혈주의, 차별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 본다. 물론 이들의 배경이 이렇다고 극단주의가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작정 못 배워먹은 것들이라고 매도하기 보다는 이런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경우를 보면 극단주의가 발생하는 배경을 조명하는 것과 동시에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반전을 통해서 알게 된 주인공의 실상을 보면 굉장히 억울한 상황이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세상과 단절된 곳에 갇히게 됐으니. 결국에는 이 억울함이 표출되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주변의 쌍둥이들을 선동하는 형태로. 그 동안 바깥 세상에 대해 알 길이 없던 쌍둥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박탈감을 자각하게 됐다고 본다. 보통 극단주의를 선동하는 주체하면 백인이 생각나던 것과 비교하면 이 역시 감독이 만들어 놓은 예외는 없다는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제목의 어스(Us), 즉 우리라는 것도 이런 의미라는 생각이다. 나이, 성별, 인종에 상관없이 박탈감에 시달리는 모두. 포스터에 나타난 모습이 극심한 공포가 아닌 억울함을 나타냈다고 본다면 그 박탈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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