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라발/황금가지
영미 소설/미국 소설
★★★★★
작품성과 별개로 작가가 비판받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대체로 잘못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런 면이 작품 속에 반영된 경우에 해당된다. 공포문학에서는 러브크래프트가 이런 경우인데, 특히 후대의 영향을 받은 많은 창작자들도 비판하는 점인 극심한 인종차별적인 면이 그렇다. 필자 역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과 공포 스타일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이긴 하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바다. 아닌 건 확실하게 아닌 것이니까. 이렇듯 작품의 유명세와 작가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탓에 현대에 와서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좋은 점은 놔두고 비판 받을 부분을 개선하거나 지적하는 방향으로.
1920년대 미국 할렘 가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토미 테스터. 배달 일을 마치고 도박으로 운 좋게 마련한 돈으로 기타를 사서 어설픈 실력으로 거리 공연을 시도해 본다. 그런 그에게 로버트 수댐이라는 노인이 거액을 제한하며 자신의 집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아 신난 것도 잠시, 토미에게 탐정과 형사 말론이 접근해 노인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하는데...
인종차별적인 면이 강해 상당한 비판을 받은 <레드 훅의 공포>를 재해석 했다는 소개답게 곳곳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이었던 말론 형사,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로버트 수댐(러브크래프트 전집에서는 쉬댐으로 번역됨.), 레드 훅에서 벌어지는 대사건 등등. 전반적인 틀은 <레드 훅의 공포>와 거의 흡사하지만, 여기에 토미 테스터라는 새로운 인물의 행적이 추가되면서 인종차별 문제를 지적하는 면으로 변주시킨다.
음악이 은근 자주 나온다는 면에서 <에리히 잔의 선율>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인상은 이러했다. 제목은 <에리히 잔의 선율>에서, 내용은 <레드 훅의 공포>에서. 그런 탓에 토미 테스터와 에리히 잔을 은근 비교해 볼 수 있어 보였다. 독일인 노인과 미국 이민자 출신 흑인 청년. 비올라와 기타. 오제이유 가와 레드 훅(가상의 지명과 실제 지명이라는 비교와 빈민가라는 공통점은 덤). 각각 악기를 연주하는 의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청각적인 공포라는 공통점.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보니 토미 테스터에게서 에리히 잔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기타 연주하는 부분을 좀 더 깊이 있게 나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자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레드 훅의 공포>에 기반을 뒀다. 음악적인 부분이 너무 강하게 부각되면 그건 그것대로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재해석 작품이라서 그런지 흔히 생각하는 코즈믹 호러스러운 면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토미 테스터의 시점인 1장은 사건의 발단 과정을 다루지만 1920년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일상 비중이 많은 편이고. 말론 형사의 시점인 2장은 원작과 비슷한 스토리 구성 속에서 오리저널 호러 요소가 나름 부각되는 편이지만 확 강렬한 뭔가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전혀 안 무섭다는 건 아니다. 점점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속도감이 붙어 긴장감이 고조되는 게 고딕소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상당히 절제됐다고 해야 될까? 전개 면에서는 분명 나쁘진 않은데 그 주변을 휘감는 기분 나쁜 분위기와 묘사가 너무 정리되어 있어 심심하다는 인상이라고 해야겠다. 깔끔한 문장이면 보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그 만큼 묘사 면에서 강렬함을 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공포소설이긴 하지만 이 소설은 여러모로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이 반영되긴 했지만 현대에도 여전한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로 어느 개인이 망가져 버리는 내용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딱히 특별한 걸 바란 건 아니다. 그저 지금과 같이 평범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돈벌이를 하는 것.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꿈꾸었으나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고.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던지고만 청년. 코즈믹 호러하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우주적 괴물이나 현상을 생각하겠지만, 이것 역시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알던 세계의 붕괴. 이해 할 수 없이 벌어진 일. 나 자신이 순식간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절망.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현실에서 금방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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