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편의점이 위치한 비탈길 밑으로 흰 봉지를 들고, 병나발을 불면서,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한심한 남자가 보인다. 땀에 찌들어 누런색을 띠는 흰 티셔츠에 잔뜩 구겨진 트레이닝 복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백수의 모습이었다. 봉지 안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녹색 야광 봉 색의 소주병 여러 개가 ‘딸그락, 딸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가 병나발을 불고 있던 병도 역시 같은 것이었다.
‘끄윽’ 하는 트림 소리가 확성기처럼 넓게 퍼지자 동네 개들이 불쾌하다는 듯이 마구 짖어댄다. 마치 술 냄새가 거기까지 난다고 하는 것처럼.
그의 안식처인 반 지하방은 조금 더 위쪽에 있었지만, 빨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 돈이 있으랴, 애인이 있으랴, 아니면 가족이 있으랴……. 아무것도 없는 빈 둥지나 마찬가지였다.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여 버려진 둥지.
처음부터 버려진 둥지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교 성적이 우수하여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학교생활을 했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에 취직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도 많이 벌었고……, 애인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알코올이 지배한 뇌 속에 잠들어 있는 머나먼 과거일 뿐이었다. 그에게 굴곡이 찾아온 것은 작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이다, 뭐다, 하면서 냉정하게 그를 해고시켰다. 불공평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 말고도 업무시간에 주식 상승세만 보고 있던 강 대리도 있었고, 성실하지 않아 매번 서류를 다시 썼던 김 과장도 있었고, 21세기에서 아직도 컴퓨터 사용이 익숙지 않아 어려움을 겪던 이 부장도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였냐고!”
분통을 참지 못한 남자는 빈 소주병을 전봇대에 집어던졌다. 산산조각이 난 소주병 조각 몇 개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남자의 발등에 박혀 피를 낸다.
“야, 이 등신 새꺄! 술 처먹었으면 곱게 갈 것이지 왜 남의 집 앞에서 지랄이야!”
전봇대 바로 뒤에 있던 2층 집 창문으로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대꾸하지 않는다. 눈앞이 해롱거려서 집주인 남자가 잘 보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된 싸움으로 경찰서를 몇 번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코올에 절여진 뇌도 알고 있던 것이다.
발에서 피가 계속 나고 있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아직 몸에 피가 많이 있고, 이 정도의 상처로 죽는 사람은 약골이라고. 참, 상황파악을 못 하는 낙천적인 생각이었다.
직장에 대한 분통 다음은 애인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가 짤리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그를 위로해 줬다. 그러나 위로고 잠시, 언제부터 인가 그 동안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동안 일 때문에 관심도 안 가져줬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냐, 등등의 불만을 갑작스럽게 내리는 폭우처럼 쏟아냈다. 그리고 결과는 이별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녀가 떠난 이유가 자신이 빈털터리가 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나비나 벌은 달콤한 꿀이 많은 꽃에 붙기 마련이고, 그 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안타까워하다 어느샌가 아는 체하지 않는 법이니까. 결론은 돈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다 얻는다는 이론이었다.
얼마 걷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벌써 반지하 방으로 내려가는 지하계단이 보였다. 원래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둥지였으나 건물 주인이 남자를 딱하게 여겨서 이곳에 지내라고 하였다. 건물 주인은 인상 좋게 보이는 50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그를 위해 버려진 둥지를 새로 리모델링해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동네 양아치 취급하면서 멀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남자가 잠이 오지 않아서 동네를 걷고 있을 때 이웃집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건물 주인이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던 것이 들렸다.
“처음에는 불쌍해서 그 창고 방을 빌려 준건데, 이제 보니까 순 알콜 중독자에 신세 한탄만 하는 형편없는 놈이더라고. 해고당했으면 다른 직장을 구하거나 아니면 막노동이라도 해야 되는데, 명문대 나온 놈이라고 그런 하찮고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이미지 손상이라면서 거부하더라. 진짜 왕 재수야, 왕 재수. 명문대 나오면 세상 다 얻는 줄 아나봐. 우리 아들은 지방대 나와서 중소기업 다니다가 해고당했는데도 매일 공사판 나가서 일하고, 신문 배달하고, 거기에다 알바까지 뛰고 있는데, 저 인간말종은 허구한 날 술이나 푸고 있는 게 정말 한심해 보인다니까. 어? 방세는 왜 안 받냐고? 그런 자식에게 돈이나 있겠어? 어차피 눈치 때문에 동네 돌아다니기도 힘들 텐데 제풀에 지쳐서 제 발로 나가게 내버려 두는 거야. 어차피 그 방은 원래 창고였으니까, 죽이 되든 말든 상관없거든.”
애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기는 왜 그렇게 무능력해? 명문대 나왔다면서 뭐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아니면 알바 같은 거라도 하든가. 뭐야? 지금 명문대 나왔다고 그런, 일하는 것이 싫다는 거야? 와! 진짜 재수 없는 자식이네. 돈 많고 외제차 끌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반지하 방에 들어선 남자는 현관 앞에 봉지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다. 저번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진 것보다는 양호한 상황이었다. 밖에서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반지하 방에는 습기에 찌들어 퀴퀴한 악취를 내뿜으며 끈질긴 생존력을 보이는 좀비 같은 검은 곰팡이와 왱왱거리는 파리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물론 남자는 그것들을 불쾌하게 느낀다. 특히 파리가 그렇다. 옆에서 얼마나 알짱거리는지. 그래도 바퀴벌레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것까지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원래 건물 주인이 이 방을 리 모델링 했을 때는 파리나 곰팡이는 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이 방에서 신세 한탄만 하면서 지낸 탓인지 방도 그를 따라서 서서히 망가져 갔다.
현관 앞에 엎어져 자는 남자의 발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멈췄지만, 그의 슬리퍼에는 붉은 얼룩을 남겼다. 방안에서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던 파리 한 마리가 남자의 등에 착지하고는 두리번 걸리며 앞다리를 문지른다. 파리는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 곧 비릿한 냄새의 출발점은 슬리퍼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남자의 등에 있던 파리는 슬리퍼까지 날아간다. 슬리퍼에 묻어 있던 붉은 자국을 발견한 파리는 흡입기 같은 입으로 쭉쭉 빨아 먹기 시작했다.
*
태양이 내뿜는 빛이 감옥 같은 반지하 방의 창문을 통과해서 남자의 두 눈을 때린다. 신음소리를 내며 남자는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본다. 어젯밤에 사 들고 왔지만, 이제는 미지근해진 소주병이 담긴 봉지는 현관 앞에 있었고, 그 옆으로 문 열어 놓는 게 버릇인 구역질하기 좋은 화장실, 안쪽으로는 너저분하게 이불이 펼쳐진 침대, 음식물 썩은 냄새를 비롯해 시쳇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이 넘쳐나는 싱크대, 긁힌 자국과 낙서로 넘쳐나는 책상, 뱀 허물처럼 널린 옷가지들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들이었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발바닥 모양의 빨간 파리채를 집어 들고는 신경질 적으로 휘둘렀다. 닌자들이 지나간 것처럼 휙휙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파리들은 기겁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뒤집혀 버둥거리고 있는 녀석이 남자의 눈에 띄었다. 짝. 드라마에서 여자들이 바람피우던 남자친구나 남편의 뺨을 후려칠 때 나는 소리와 함께 파리는 묵사발 났다.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남자는 파리채로 여러 번 내려쳐 쥐포처럼 납작하게 만들었다. 뭘 먹었는지 모르지만, 파리의 터진 내장에서 누런 덩어리가 질질 흘러나왔다.
“다 봤지? 한 번만 더 까불면 다 쥐겨버린다!”
파리가 다 숨어버린 빈방에서 남자는 소리쳤다. 그리고 이네 파리와 대화를 시도한 자신이 한심해 보였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말을 주고받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바닥에서 잠들어서 그런지 온몸에 석고를 바른 것처럼 뻐근했다. 그는 침대 위에 눕고 싶었지만, 침대에 눕는 것과 동시에 곰팡이가 천장에 그려놓은 혐오스러운 추상화를 봐야 하기 때문에 이불을 바닥에 끌고 와서 누웠다. 침대 바로 위의 천장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상태는 괜찮았다.
밖의 날씨는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지하 방도 절절 끓어오르기 시작한 지 오래다. 창문을 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았지만, 방충망도 없는 창문이라 벌레가 들어오기 때문에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리만은 예외였다. 그것들은 방문을 콘크리트로 막는다 해도 들어오는 것들이었다. 그는 파리가 들어오는 곳을 찾기 위해 방 구석구석을 보았지만 금방 포기해 버렸다. 귀찮았고, 어차피 잡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방에 시계가 없었고 핸드폰도 잃어버린 지 오래라서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지만, 허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특수부대원처럼 싱크대 아래에 있는 찬장까지 기어갔다. 찬장 안에는 며칠 동안 먹을 양의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누구다 할 줄 안다는 라면 끓이는 것조차 못하는 바람에 그는 매일 컵라면으로 때우고 있었다. 설거지도 할 줄 몰라서 이곳에 입주한 첫날 건물 주인이 대접한 저녁상에 올라간 그릇들이 며칠 내내 방치되고 있다. 사흘 전 편의점에서 매일 컵라면만 사가는 남자를 보고 아르바이트생이 “그냥 냄비에 물만 끓이고 면과 스프만 넣으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네, 왜냐하면 학교에서 물 맞추는 법을 안 가르쳐 줬기 때문입니다.”
책상 아래에 있던 가스버너로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실내는 찜질방 불가마처럼 더워졌다. 땀이 비오는 것처럼 줄줄 흘렀지만, 그는 창문을 열면 방이 폭발해버린다고 믿는 것처럼 절대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가 라면에 집중하는 사이 숨어 있던 파리 녀석들이 다시 나와서 왱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만큼은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배고파서 물이 끓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그런 하찮은 하등 생물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리들은 남자가 묵언 수행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주위를 맴돌며 짜증을 돋치고 있었다. 마침내 파리 한 마리가 그의 귀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바람에 남자의 인내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씨발 새끼들!”
파리채들 다시 잡아든 남자는 가장 가까이 있는 책상 위에 착지한 녀석을 재빠르게 뭉개버리고는 천장에 붙어 있던 녀석들도 단번에 때려잡았고 마지막으로 바닥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녀석을 터트렸다. 바닥에서 터진 녀석은 암놈이었는지 구더기가 나와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더러워 정말.”
터진 파리의 시체 때문인지 입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과 위장이 따로 노는지 배에서는 얼른 라면을 들이부으라고 요란이었다. 파리와 전투를 벌인 현장을 수습하고 난 후에도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배에서 요구한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르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속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이 다 끓자 스프를 털어 넣고 포장 뚜껑을 반쯤 열어둔 컵라면 안으로 물을 부어 넣었다. 밖의 비탈길을 내려가서 편의점 모퉁이를 돌아 10분쯤 걸어가면 시원한 냉면 집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시원한 것을 먹고 싶어서 한번 컵라면에 찬물을 부어서 먹어봤지만 밋밋한 맛에 먹기를 포기했다.
한참을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있는데 벌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깜짝 놀라 방안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싱크대에 앉아 있는 왕파리를 발견했다. 왕파리는 일반 파리들보다 더 대담했기 때문에 남자가 제일 싫어했다. 라면 냄새를 맡았는지 놈은 전투기보다 빠른 속력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투를 준비하면서 남자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히 아까 전에 전부 박멸시켰는데, 창문도 닫힌 밀폐된 방에서 어디로 들어왔는가였다. 그는 벌써 세 번째로 파리채를 든다. 징그럽게도 생긴 초소형 초음속 전투기는 남자가 무기를 챙기는 사이 그의 다리에 달라붙어서 남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녀석이 다리 위에서 움직이면서 온갖 기분 나쁜 느낌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대학 시절 친구 녀석이 브라질로 배낭여행 같다가 까만 젤라틴 같은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서 기어 올라오던 기분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는데 지금 딱 그런 기분이었다. 사물의 용도를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파리채를 자주 접한 내공이 있던 것인지 모르지만 해중 주제에 지능이 조금 높은 것처럼 보였다.
“이 새끼가 너 뒤졌어!”
아까 와 같이 파리채를 아서 왕이 바위에서 뽑은 엑스칼리버처럼 허공에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 와 같이 도망가거나 뒤집혀서 추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놈은 파리채를 피해서 얼굴로 달려들어 눈과 콧구멍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저리 꺼지라고!”
달려드는 놈을 손으로 밀쳐 내려고 허공을 마구 할퀴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왕파리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대피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는 뛰어올라서 천장에 붙어 있던 초음속 전투기를 격추했다. 처참하게 박살 난 초음속 전투기는 천장에서 떨어져 컵라면 국물 속으로 추락했다. 이른바 자폭을 한 것이었다.
“이런 제길…….”
하지만 상관없었다. 징그러운 전투기를 상대하느라 면은 불어터져서 우동 면이 되기 직전이었다. 남자는 파리의 잔해가 혼합된 컵라면을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참, 오랜만에 겪는 화려한 점심 식사였다.
*
반지하방 문밖에서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빈 병들을 세고 있었다. 고물상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마일리지 점수에 알맞은 개수였다.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돈을 쉽게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가 항상 고수하던 방법이었다. 비록 한 병에 만 원도 되지 않았지만. 계단 구석에 굴러다니던 포댓자루에 병을 쓸어 담은 남자는 계단을 올라가 더 윗동네에 있는 고물상으로 향했다. 포대에 담긴 병들의 무게 때문에 암벽등반처럼 힘들어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자, 봐라. 젊은 놈이 뭐 저런 일을 하고 있냐?”
“그러게 말이야. 우리 아들도 저 꼴 날까봐 대학 안 보내려고.”
“근데 얼마나 술을 퍼부었기에 병이 저렇게 넘쳐난데?”
“자가 먹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네에 있던 거를 줏어 모은 거야. 이 동네에 폐지나 빈 병 모으는 어르신이 꽤 되는데, 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참.”
고물상에서 빈 병을 팔고 나온 돈은 회사 다닐 때 월급의 반의반도 안 됐지만, 먹을 것을 살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쁠 오후 시간이었지만 남자에게는 끝나지도 않을 것 같은 고문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파리만 지겹게 달라붙는 반지하 방을 나와 동네 밑에 있는 공원에 가거나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공원은 자주 북적거리는 노인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가끔 가는 편이었고 지하철역은 노숙자들이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에는 노인들이 공원에 나오는 날이 아니었기에 공원으로 향했다. 남자가 공원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벤치에 앉아서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학원에 갔거나 저 출산문제로 사라진 아이들로 인해 버려진 놀이터의 그네를 타기도 했다. 여름 바람 같지 않은 차디찬 바람이 몰아쳤다. 기상청에서 떠들어대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일 것이다. 아니면 육지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던지. 늘 하던 대로 벤치에서 그네를 타러 가던 남자는 놀이터에서 난생처음 보는 무리를 발견했다. 행색은 고등학생인데, 두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침 뱉는 모습이……딱 일진이었다.
“야! 거기 이리와 봐!”
젠장, 잘못 걸려들었다. 남자는 공원 입구로 뛰기 시작했다.
“저 새끼 잡아!”
일진들이 엄청난 속도로 뒤쫓아왔다. 왕년에 운동회나 체육대회에서 계주까지 뛰던 그였지만 실직한 뒤에 불어나기 시작한 술 배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고 말았다.
시대가 지나도 일진들의 주먹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맵고, 거침없었다. 일진들의 발길질이 끝나자 곧바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 새끼 이거밖에 없어?”
“완전 병신이네. 만 원 이상이었으면 담뱃불로 지져버릴까 했는데……너 운 좋은 줄 알아!”
그렇게 남자는 일진들의 침 세례와 함께 오늘 일당을 전부 뺏겼다. 그것도 자기보다 몇 살 어린 것들에게 말이다. 학창시절에도 수없이 봐왔지만 이제 보면 공부해서 대학가는 사람들보다 대학을 안 간 사람이나 일진들이 더 잘사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아무 쓸모 없는 똥개훈련을 16년……아니 그 이상 해왔다. 아무 이유도 모른 체. 어쩌면 대학을 가지 않았거나 일진이 된 애들은 억압받는 반발세력인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이것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낙오자들이 뭘 알겠어…….’
다시 그 공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는 저녁 시간이 돼서야 반지하 방으로 돌아왔다. 일진들에게 맞은 것을 알 길이 없던 동네주민들은 어디서 또 싸움질이나 하고 왔다고 생각했다. 한심한 놈.
저녁도 역시 컵라면이었다. 하지만 기분 전환할 겸으로 가장 아껴놨던 짜장 라면을 꺼내왔다. 짜장 소스에 밥이라도 말아 먹고 싶었지만, 남자에게는 쌀이 없을 분더러 밥하는 방법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 번 돈이었으면 즉석 밥이라도 살 수 있었는데.
짜장 라면을 먹다 보니 진짜 짜장면이 먹고 싶어졌다. 고물상 근처에 있던 중화 반점을 봤던 탓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 것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 주인 아주머니가 짜장면을 시켜 드셨는지, 건물 현관에 중국집 그릇이 있었다. 짜장면 반과 군만두 몇 개도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가져다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노숙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동네 개나 고양이가 입을 댔거나 바퀴벌레들이 후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히 그런 것을 먹고 배탈 날 바에는 차라리 컵라면이 나을지도 몰랐다.
짜장 라면을 짜장면으로 생각하며 먹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반쯤 열린 화장실 안에서 ‘부우웅’ 하는 소리가 났다. 방역차 소린가 했지만 분명 파리가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뱃고동소리같이 거대해서 파리라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파리가 거기서, 거기겠다는 근거 없는 낙천적인 생각으로 파리채를 잡아들려는데 화장실 문틈 사이로 무언가 재빠르게 튀어나와 책상 위에 착지했다.
비명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남자의 눈앞에 있는 생물은 분명히 파리였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합성사진 속에 있던,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고 생물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거대 생물과 비슷한 파리였다. 얼핏 봐도 주먹만 한 크기였다. 놈의 다리 하나, 하나의 마디와 털까지 뚜렷하게 보였고 미러볼 같은 두 눈은 남자를 노려보듯이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파리들과는 다르게……흡입기 같은 입이 있을 자리에 사마귀 같은 입이 있었다.
잽싸게 파리채로 책상 위에 있던 놈을 내려쳤지만 놈은 어느 순간 날아올라 파리채를 든 남자의 손을 들이박았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차 돌맹이에 맞은 기분이었다. 남자가 파리채를 떨어뜨리자 놈의 무차별 박치기가 이어졌고 급기야 머리에 앉아서 대관령 목장의 풀을 뜯는 한우처럼 머리카락 한 뭉큼을 거칠게 뜯어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놈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이자 남자는 반지하 방을 뛰쳐나왔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들을 만나러 가던 건물 주인이 보였다.
“저기요! 방에……… 주먹만 한 파리가 있어요!”
건물 주인은 자폐아를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혀를 찼다.
“허구한 날 술이나 푸더니 이제 정신까지 나갔나 보지? 아니면 그것도 모자라서 마약이라도 하는 거냐?”
그렇게 건물 주인은 남자를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갔다. 진짜 자기가 헛것을 본 게 아닌지 남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지만, 놈에게 머리카락을 뜯긴 것을 생각하면 절대 헛것이 아니었다. 밖에서 창문으로 들여다본 방안에는 아까 보았던 괴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째 방치되고 있던 쓰레기장뿐이었다. 다시 방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안심하고 자리에 눕던 남자의 눈에 아까 먹던 컵라면 용기가 보였다. 분명히 내용물이 약간 남아 있었는데 국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컵라면 용기도 뜯어 먹었는지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불안한 마음에 남자는 놈이 처음 튀어나왔던 화장실 문을 닫고 잠을 잤다. 남자가 잠결에 들었는지 모르지만 밤새도록 화장실 문에서 거친 노크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어제 있었던 괴물체 사건을 밤새 까먹었는지 잠결에 화장실에 들어선 남자는 변기에 앉아 있는 수많은 시커먼 눈의 소유자와 마주치자 혼비백산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문전박대에 격분한 거대 파리는 사채업자들처럼 문을 사정없이 들이박기 시작했다. 저렇게 박고만 있다가 벽 같은데 잘못 박아서 터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통 파리처럼 멍청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질 리가 없었다.
일반 왕파리는 사물의 용도를 파악할 만큼의 지능이었으면, 이번에 나타난 거대 파리는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에 대항하고 공격 전략까지 짤만한 수준급 지능으로 보였다. 동물로 치자면 원숭이 정도라 할까.
남자는 도대체 저런 거대한 파리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밖에 돌아다녔다면 벌써 주민들의 눈에 띄어 연구실로 잡혀가서 생물학자들이 온몸을 해 집어 놓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 말도 안 되는 것은 어제 남자가 반지하 방을 나서기 전 현관문과 창문을 잠가놨는데도 불구하고 저 차돌맹이 만한 녀석이 어디로 들어왔냐는 것이었다. 이건 평소에 보던 파리와는 대조도 안 될 정도의 미스터리였다.
저 파리가 방사능에 피폭된 괴생명체이든 외계인이든 간에 어떻게 든 저 파리를 처치해야 했다. 119에 신고할까 했지만, 어제 건물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장난전화 취급하고 무시할 게 뻔했다. 경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론을 짓자면 남자 혼자서 저 괴생물체를 처치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 전투 상황을 생각해보면 파리채 가지고는 놈을 제압할 수 없었다.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어제 일당을 전부 뺏겼긴 했지만, 책상 안에 숨겨둔 돈이 있어서 무기를 살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편의점 문 열 시간에 맞춰서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를 보고 아르바이트생은 인상을 썼다. 거대 파리 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나와서 얼굴과 머리에 기름이 번들번들했고 고약한 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단골손님 중에서 가장 보기 싫던 찌질 남이 아침부터 나와 있었으니 길을 가다가 새똥에 맞고 맨홀에 빠지는 것보다 더 짜증났을 것이다.
편의점에 들어선 남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살충제를 과일 고르듯이 이것저것 살피고 있자 아르바이트생이 관심을 보였다.
“저…뭐 찾으세요?”
“아……그게……살충제 중에서 좀 쌘 거 없어요? 한 방에 팍 가는 거요.”
예전부터 집에 파리가 많다고 투덜대면서 살충제 한 번 사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살충제를 찾는다고 하니 아르바이트생은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퀴벌레라도 나온 거예요? 안 그러면 해충 방제 센터 같은데 연락해 봐요. 살충제 같은 거로 하면 절대 안 없어져요.”
남자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이 솔깃했지만, 비용이 많이 나올까 봐 걱정이 됐고 거기서도 정신병자 취급을 할까봐 접어두기로 했다.
“돈도 없는데 그런 곳에 연락하면 뭐해? 살충제 좋은 거나 내놔봐!”
말을 꺼낸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 아르바이트생은 대충 아무거나 집어다가 남자에게 건냈다. 어차피 살충제는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남자가 꾸깃꾸깃한 지폐를 카운터위에 올려놓자 아르바이트생은 꾹 짜면 구정물이 질질 나올 것 같은 걸레를 잡는 것처럼 잡아다가 계산대에 넣었다. 잔돈을 건넬 때도 이런 사람에게는 100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잔돈을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잘못해서 점장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부족한 학비를 채우려던 아르바이트는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살충제를 사 들고 나온 남자는 잔돈을 주머니에 넣다가 한창 담배 피울 때 쓰던 라이터가 손에 잡히자 기막힌 작전이 떠올랐다. 비록 잘못 돼서 집을 홀라당 날려버리고 건물 주인에게 정신 나간 방화범으로 몰려서 교도소로 이사 갈 수도 있지만, 화장실에 물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런 일은 사전에 방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반지하 방에서는 아직도 놈의 거친 노크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파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들어왔지만, 놈은 귀도 좋은지 노크를 그만두고 내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언제 입은 건지 기억나지 않던 벨트가 끼워져 있는 청바지에 기습 공격용 파리채를 일본 사무라이의 검처럼 끼워놓고 라이터와 살충제를 서부 총잡이의 권총처럼 손에 쥐고 남자는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한순간에 오는 기회를 놓치면 사망이나 방화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살충제 가스가 들어갈 정도로 문을 아주 살짝 열자 파리는 좁은 틈으로 나가려다 문에 박고 뒤로 나자빠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는 살충제를 마구 뿌려댔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살충제 냄새를 맡자 파리는 악을 쓰는 것처럼 더욱 거칠게 날개 소리를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귀 아픈 소리처럼 냈다. 놈을 정신없게 하려고 한 번 더 살충제를 진하게 뿌리고 남자는 재빨리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파리는 팔팔하게 날면서 재빠르게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놈이 페이크를 쓴 것이다. 왕파리는 천장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화장실 문을 열고 멍하니 서 있던 남자를 보고는 이를 보이면서 달려들었다. 남자는 화염방사기를 쓸 용기가 나지 않아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 이불을 집어던져 파리를 덮어버렸지만, 맹견처럼 이불을 거칠게 물어뜯어서 곧바로 탈출했다. 겁에 질린 남자는 바닥에 널린 옷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지만, 놈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남자에게 점점 다가왔다. 다 포기하고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놈이 재빨리 현관문 손잡이에 앉아버려서 도망치기도 힘들었고 창문은 빌어먹을 방범용 철창으로 막혀 있어서 불가능했다. 놈이 독기를 품은 눈으로 문 손잡이에서 달려들자 다시 한 번 살충제를 허공에 마구잡이로 뿌렸지만, 놈은 그것마저 다 피해버렸다. 살충제 가스를 피하자마자 놈은 턱밑으로 달려들어 박치기로 어퍼컷을 날리는 바람에 남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남자의 팔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개한테 물리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느껴졌다. 남자는 팔을 물고 있는 놈에게 주먹 한 방을 먹이려 했지만, 놈이 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상처부위를 때려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어느새 책상 위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파리는 비웃는 것처럼 팔을 비비고 있었다. 부상이 심한 탓에 남자는 후퇴해야 했지만, 놈이 금세 현관문을 막기 때문에 남자가 피신할 곳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남자는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빨리 닫았지만 파리는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꼼짝없이 포위된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마지막 발악으로 남자는 살충제를 닥치는 대로 마구 뿌렸다. 화장실 안은 연막탄을 터트린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런데 왕파리는 최루탄을 맞은 것처럼 정신없게 좁은 화장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실이 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역시 벌레는 벌레였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벨트 사이에 끼워 놨던 파리채로 선제공격을했지만 정신없는 통에도 놈은 가뿐하게 피했다. 그래서 살충제 통을 충분히 흔들어서 내용물의 양을 확인한 뒤 가스 배출구 앞에 라이터를 대고 놈이 탈진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놈은 세면대 위에 비틀거리며 착지하자 남자는 라이터를 켜는 것과 동시에 살충제를 뿌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즉석 화염 방사기는 전장에서는 별 효력은 없겠지만, 거대 파리를 잡는 대는 효과가 좋았다. 불을 뒤집어쓴 왕파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다시 날아오르려 했지만 날개가 순식간에 다 타버리는 바람에 세면대 위에서 서서히 구워져 갔다. 놈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고 있자 하니 삼겹살이 생각났다. 이 파리도 남자를 두 번 죽이고 숨을 거둔 것이었다. 냄새는 맛있게 느껴졌지만 절대로 이것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게 나을 듯했다. 놈이 움직임이 없어지자 세면대에 물을 틀어서 놈의 몸에 붙은 불을 껐다. 하지만 삼겹살에 대한 생각은 없어지지 않아 책상 서랍 안에 있던 구급상자로 상처부위를 치료한 다음 편의점에 가서 소시지 같은 것을 사와야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시지를 사러 나가는 길에 파리의 시체가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이곳에 들어올 사람도 없고, 누가 집어가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남자는 반지하 방으로 성큼성큼 내려오려던 건물 주인과 마주쳤다.
“방에 뭔 짓을 하 길래 이렇게 소란스러워!”
파리와의 전투가 심하게 격렬했는지 밖에까지 소리가 다들 린 것 같았다. 어차피 사실대로 말하면 근처 정신병원에 연락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남자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그냥 파리 잡느라……하하하…….”
건물 주인은 남자를 하루 종일 온라인 게임에 빠진 폐인처럼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올라갔다. 남자의 팔에 난 상처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았다.
소시지를 사서 온 남자는 늦은 점심으로 컵라면과 함께 같이 먹으면서 거대 파리에 대한 기억을 지워 갔다. 오늘따라 큰일을 치러서 그런지 아니면 소시지가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라면이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뭔지 모를 공허감이 속을 안 좋게 했다. 내 목숨을, 내 영역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전쟁을 벌였지만, 그 누구도 내 영토가 침략당했는지, 또 누가 침략을 했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한 줄 긋는 대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오후 일정대로 지하철역으로 나가려던 남자는 천장에서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잠시 주춤했지만, 위층에서 사는 부부의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것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
지하철역에 갔다가 돌아온 남자는 컵라면을 꺼내서 먹으려는데 화장실의 거대 파리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파리의 시체는 온대 간대 사라지고 없었다. 시체 파편 하나하나까지. 그 세 누가 들어와서 토픽감이라고 집어간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동네 어느 사람이라도 폐가처럼 꺼려하는 곳이 남자의 반지하 방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 징그러운 시체를 가져간 것일까. 어쨌든 간에 골칫덩어리 괴물이 사라졌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들어온 김에 세면대에서 손이라도 씻고 있던 남자는 오후에 나가기 전에 들었던 천장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또 들었다. 쥐가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남자는 이곳에 살면서 쥐를 본 적도, 이렇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올 때면 늘 따라붙던 파리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보스가 죽어서 다 도망가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에 야근할 때 느꼈던 피로감을 오랜만에 느낀 남자는 이 방에 들어 온 지 처음으로 일찍 자기로 했다. 비록 거대 파리와의 전투로 걸레가 된 이불을 덮고 잔다 해도. 평소 남자는 기본적으로 새벽 2시가 돼서야 잠을 잤었다.
천장에서 들리는 인기척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가면 갈수록 위층에서 뛰어다닌다는 느낌보다 천장 바로 위에서 누가 기어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 안에 진짜 누가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닥에서 일어나 파리채 손잡이로 천장을 두드려 보았다. 두드림에 반응을 보였는지 천장 위는 잠잠해졌다. 그런데 두드린 지점에서 3m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프한다 해도 소리가 날 텐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형체가 없는 생물이라면 모를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천장 안을 들여다보기로 하고 남자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지금은 난생처음 겪은 미지의 존재, 혹은 태고에 생겨난 다양한 생물들 중 자연의 분노와 인간의 눈을 피해 생존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괴생명체와의 전투로 인해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천장에서는 남자의 잠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요란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천장 속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3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해가 뜨기 전에 기필코 천장 안에 있는 무언가를 잡아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정전 났을 때 대비하여 사다 놓은 손전등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배수관 누수나 고장 때문에 화장실 천장은 열리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변기 위에 올라서자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천장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 영화 주온에서 가야코가 기괴한 목소리를 내면서 다락방에서 튀어나오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오랜만에 취하는 진정한 휴식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괴생물체라도 단번에 때려잡겠다는 허풍 같은 생각이 남자를 부추겼다.
천장으로 머리를 들이 밀은 남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어둠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자 긴장이 앞섰지만 손전등을 켜자 안심이 됐다. 불빛으로 밝아진 천장 속세계는 회색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다 종류의 파이프가 손전등의 불빛이 닫지 않는 어두운 심연까지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먼지 구름과 거미들의 집을 제외하고는 생명체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심연 속에 소음의 주인공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남자는 천장 안으로 더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약한 물 냄새와 파이프 마디마다 흘러나오고 있는 녹물 때문에 앞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배관공의 일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구더기였다. 그동안 밀폐된 반지하 방에서 파리가 계속 출몰한 이유가 이거였다는 게 밝혀지자 남자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이것들을 어떻게 없앨지 걱정이 앞섰다.
5분쯤 앞으로 가고 있을 때 회색빛 사면이 검게 변하는 구간이 나타났고 그 구간은 기찻길처럼 어둠 속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일반 색이라 치고는 뭔가 엄청난 혐오감이 느껴졌다. 반지하방 곳곳에 있던 검은 곰팡이와 다른 뭔가가. 조심스럽게 검은 구간 가까이 다가가던 남자는 손전등 불빛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거구의 눈을 보았다. 아침에 타죽었던 놈과 똑같은 검은 미러볼 눈을 말이다. 하지만 그놈과는 달리 진짜 미러볼처럼 거대했다. 거구는 점점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점점 다가왔다. 놈의 모습을 보자 남자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감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생명체를 찰스 다윈을 비롯한 전 세계의 생물학자들이 본다면 종의 기원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몇 세기 동안 쌓아왔던 생물학을 전부 뒤엎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 머리만 한 파리가 있을 수 있는 건지, 기막힐 나름이었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남자 본 녀석은 그저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이 생물체에게 파리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그것’이라는 명칭이 어울릴 것 같았다. 아니면 윌리엄 골딩의 소설 제목인 파리 대왕이라고 해야 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들쑤시는 사이 그것은 고양이 같은 발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서서히 다가오자 뒤에 숨겨져 있던 어떤 물체가 손전등 불빛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세면대에서 잘 구워진 거대 파리의 시체였다. 그 뒤로 시체와 같은 크기의 녀석들 몇몇의 모습이 들어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검은색의 사면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자세히 보니 그것 또한 생명체였다. 거대하게 밀집되어 있던 잔잔한 생명체들은 반지하 방에 들어올 때부터 줄곧 남자를 괴롭혀온 하등생물들이었다. 차라리 이 소음을 무시하고 잤다면 놈들의 유토피아, 혹은 서식지로 제 발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남자가 온 힘을 다해 몸을 뒤로 내빼자 파리 대왕은 공격신호라도 되듯이 날개 짓을 하자 검은 사면이 잔잔한 점들로 순식간에 분리 되서 남자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조금이라도 막지 않았다면 남자의 얼굴은 파리들로 뒤 덥히는 것은 물론이고 코와 귀, 입으로 순식간에 파고 들어가 죽었을지도 몰랐다.파리 때로 인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은색의 도배가 벗겨지자 놈들의 바글바글한 후예들의 모습이 들어났다. 그중 아직도 남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끔찍한 장면은 아직도 진짜인지 아니면 헛것을 본 것인지 모르지만 손가락 굵기의 구더기들을 본 것 같았다. 5분 되는 거리의 좁은 천장 통로를 3분 만에 지나오면서 남자는 배수관 여기저기에 팔다리를 심하게 부딪친 것은 물론이고 배수관 밑에 고여 있던 쇳물과 썩은 물로 온 몸이 더러워졌다. 천장 통로에서 화장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남자는 아파할 틈도 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벌 때 같은 파리들을 피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거대 파리 무리들이 도착했는지 문을 마구 두들겨서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놈들의 박치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섬뜩한 곤충의 날개 소리가 들리더니 놈들이 박치기를 멈췄다. 잠시 침묵이 이어져서 놈들이 포기하고 돌아서는 가 했지만 느닷없이 문고리가 철컥 돌아갔다. 남자가 문을 다시 닫으려 했지만 이어진 거대 파리들의 박치기로 문은 거칠게 열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던 반동으로 바닥에 넘어진 남자는 화장실 안쪽 문고리에 앉아 있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파리는 참 이상한 놈이다, 어떻게 크기가 커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지…….
이런 말 밖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예전에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 삼아 나왔던 말이었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했지만 지금 남자의 경험상 남들이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다른 말로는 절대로 남들이 알면 안 되는 금기의 진실이었다.
그것이 행동 개시를 하자 화장실 천장으로 시커먼 것들이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마구 튀어 나와서 순식간에 커다란 덩어리를 구성했다. 마치 태양계 바깥에 존재한다는 오르트의 구름 같이 보였다. 아침 전투 때 사용하고 책상 위에 놔둔 살충제와 라이터를 집어든 남자는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 파리들을 향해 살충제 가스와 라이터로 만들어낸 불기둥을 날렸지만, 건전지를 갈아 끼우듯이 파리가 죽으면 곧바로 화장실 천장에서 다른 무리들이 튀어나와 거대한 덩어리의 빈틈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방바닥이 불에 탄 파리의 시체로 새카맣게 변하는 사이 주먹만 한 거대 파리들은 남자가 파리 덩어리에 신경 쓰고 있는 사이 남자의 등 뒤로 날아가 그대로 들이박았다.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 돌려차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남자는 파리 덩어리 앞으로 넘어졌다. 곧바로 놈들이 달려들 것 같아서 남자는 살충제와 라이터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벌레라고는 할 수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라이터를 남자의 손에서 떨어뜨린 후 살충제를 집어가 버렸다. 이런 급박한 순간에도 그것의 지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한 이유는 뭘까? 놈이 생각하는 한계가 궁금한 탓일까?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간 사이 온갖 크기의 파리들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놈들은 피부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며 조금씩 맛을 보는 것 같았다. 놈들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거대한 녀석들은 계속해서 박치기를 가하는 바람에 일어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끝없는 돌팔매질이 기약 없이 계속 되다가 어느 순간 멈추자 남자는 놈들도 자신을 먹을 준비를 한다는 오싹함을 느꼈다. 놈들의 다리가 팔위에 닫는 느낌과 침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팔다리에 떨어지는 것이느껴지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온몸에 끈끈이처럼 붙어있는 파리들을 손으로 대강 뿌리친 다음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파리 대왕이 현관문 손잡이를 막고 앉아 있었다.
이제 그것과의 정면 승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면승부를 원했는지 자기 수하들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날개로 소리를 냈다. 이미 남자의 영토는 점령당한지 오래고 놈들의 서식처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을 알아챈 이상 이곳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지옥보다 더한 이곳에서 탈출하여 살고 싶을 뿐이었다. 놈이 머리를 굴릴 사이 남자는 놈의 시선을 분산 시킬 도구를 찾기 위해 방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바닥에 굴러다니는 뱀허물 같은 옷가지들과 흉물스럽게 찢어진 이불뿐이었다. 어떤 것으로 하던 파리 대왕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파리 대왕이 벌써 눈치를 체고 있다면 꼼짝 없이 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었다. 단순히 집어던지는 것으로 하기 보다는 뭔가 기발하고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그것이 기회를 줄까? 턱도 없는 일이다. 그것이 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사람이랑 대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놈에게 굴복하는 것은 지적 생물로서의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정면대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생물 종 간의 자존심을 건 머리싸움이기도 했다. 남자는 무작정 넓게 방어할 수 있는 이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알지 못하게 몰래 옷가지 몇 개와 다 떨어진 벨트를 집어 들었다. 뒤쪽의 엄청난 관중들이 그것을 보고 반칙이라고 야유하는 것처럼 날개를 비벼 귀를 막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그것은 확성기에 버금가는 날갯소리를 내면서 야유를 잠재웠다. 반칙도 대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자가 대결 준비가 된 것을 보고 공격 자세를 준비하고 있는데, 남자는 왠지 그 모습이 스페인이나 남미 쪽에서 즐겨한다는 투우에 나오는 성난 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붉은 천 대신 누리끼리한 이불을 들고 긴장 상태에 있는 남자는 투우에 처음 나와 본 아마추어 투우사의 모습과 비슷했다.
투우? 그래, 바로 그거야!
어중간하게 이불을 들고 있던 남자는 한 번도 본 적도 없던 투우사의 자세로 이불을 들었다. 그것이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는 핼리 혜성처럼 남자에게로 돌진해오자 남자는 이불로 잽싸게 그것을 통과시켜버리고 이불과 동시에 들고 있던 벨트를 채찍처럼 휘둘러서 그것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그것이 바닥에 추락하자 남자는 현관문 쪽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그것을 이불과 옷가지로 덮어버렸다. 대결은 남자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지만, 수하들은 절대로 인정 못 하겠다는 것처럼 남자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정면대결을 원했지, 대결에게서 이기면 나가게 해준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파리들도 은근히 자존심이 강했다. 남자는 벨트를 휘둘러 놈들의 접근을 최대한 막으면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문틈을 비집고 나온 몇 마리의 파리는 남자에게 끈덕지도록 들러붙었지만, 이제는 그저 멍청한 하등생물로 보였기 때문에 남자는 손쉽게 멀리 쫓아버렸다.
밖은 아직 새벽 시간이었는지 태양의 빛은 보이지 않고 고요한 암흑이 내려와 있었다. 이제 여름도 짐 싸서 떠나려는지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이제 어디로 가지…….
괴물 파리에게서 도망쳐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씁쓸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하등생물에게 집을 뺏겨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빈 둥지로 알았던 곳이 사실은 파리들의 소굴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계단을 올라 고독하게 길바닥을 비추는 가로등만 버티고 서 있는 비탈길을 내려간 남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몸이 따르는 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사라진 거리에서 힘없이 걷는 남자의 모습은 누가 보면 좀비로 오해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좀비 걸음으로 남자가 도착한 곳은 지하철 역 앞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지하철은 갈 곳 없는 이들의 최적의 장소였다. 추위를 막을 수도 있고, 역무원 말고는 뭐라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지하철만 안다녔으면 현대식 동굴이나 다름없었다.
지하철역에 들어서자 안자고 깨어있던 일부 노숙인들이 남자를 불청객인 마냥 쳐다보았다. 그 중 두꺼운 종이 박스를 덮고 있던 노숙 인이 남자를 보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형씨, 이제 오셨네. 건물 주인이 쫓아낸 거지? 그러게 내가 예전부터 빨리 오라고 했잖아. 벌써 다른 사람들이 좋은 자리 다 차지했다고.”
남자는 노숙 인의 말을 무시하고 화장실 근처에 맨 바닥에 누웠다. 화장실 쪽에서 보이는 시계의 시각은 새벽 3시 40분이었다. 오늘따라 남자는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늘 말하던 엄마의 말이, 공부 잘하는 아들 뒀다고 칭찬하던 아빠의 말이 그리웠다. 그때로 돌아가고는 싶었지만, 세월은 남자의 소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자연의 순리와 모든 사람에게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의 규칙이 남자 한 명 때문에 흐트러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눈물로 잠을 청하던 남자는 지하철역 바닥에서 올라오던 냉기 때문인지 갑자기 팔이 뻐근해서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다. 뻐근했던 팔은 주먹 만 한 파리와 전투를 벌일 때 상처가 났던 곳인데, 염증이 생겼는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팔의 뻐근함은 통증으로 이어졌다. 통증을 견디다 못한 남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로 팔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파리에게 물린 상처는 종기가 난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상처부위가 조금씩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점차 손가락 마디만한 막대모양 여러 개로 나뉘어서 팔 전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처부위가 부풀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남자의 피부 속에 생명체가 꿈틀거린다는 것이었다. 그 주먹 만 한 것이 언제 남자의 팔에 지뢰를 매설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의 서식지를 벗어났지만, 그것의 손길은 아직도 남자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팔에 들어있는 그것의 자손들을 제거하기 위해 남자는 휴지를 많이 뽑아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걸레를 쥐어짜는 것처럼 자신의 팔을 휴지로 감싸 비틀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몇 마리는 여드름이 터지는 것처럼 핏줄기와 함께 튀어나왔지만, 나머지는 기습을 피해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필 놈들이 피해서 이동하던 지점이 목이여서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놈들을 제거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다. 혹시나 주위에 다른 것이 없는지 둘러보다가 남자는 휴지통에 버려져 있는 면도칼을 발견했다. 벌써 놈들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온 상황이라 남자는 세균에 오염되어 있을지 모르는 면도칼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 어깨 살을 마구 도려냈다. 곰에게 공격당한 것 같은 끔찍한 상처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피에는 급류에 휩쓸려 강의 하구까지 떠내려 온 잔해들처럼 손가락 굵기의 구더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이제 진짜 모든 것이 끝났나 싶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남자의 목을 뚫고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구멍 뚫린 자리를 부여잡고 고통의 몸부림을 치던 남자는 바닥에 기어 다니는 팔뚝 굵기의 붉은 구더기를 보았다. 역시 그것의 자손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머리가 유능했다니. 지금까지 파리들에게 당한 것 중에 가장 치밀하고 잔혹했다. 아마 이제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목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 폭포수는 화장실 바닥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 웅덩이를 형성했다. 피의 웅덩이에 머리를 박은 체 의식이 흐려져 가던 남자는 천장에서 익숙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보았다.
천장 뚜껑이 열리면서 주먹 만 한 파리가 내려와 남자의 옆을 기어 다니던 거대한 구더기를 집어 들고는 다시 천장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파리들은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천장 안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천장 안은 시커먼 색을 띠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기 마지막 순간 남자는 천장 속에서 아래를 치켜보고 있는 그것을 보았다. 평범한 미러볼 모양의 거대한 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사이코 살인마가 희생자를 제거하고 느끼는 쾌거를 느끼는 눈빛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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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화장실 어느 칸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 역무원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경찰은 남자가 살던 동네와 노숙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타살 여부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은 남자의 지문이 뭍은 면도칼과 언제부턴가 정신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정신이상으로 자해하다가 면도칼로 목을 긋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다만, 몇 가지 이상한 점은 평소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하던 곳이라 파리가 보이지 않았던 곳에서 사망추정시간과는 달리 시체에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구더기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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